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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돌산지맥 (소미산, 대미산, 봉수산, 천왕산, 봉황산, 항일암)

#돌산지맥
#소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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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산
#봉황산
#항일암

오늘은 돌산노루귀, 동백꽃, 솔나물, 길마가지나무꽃, 항일암, 그리고 남도에 부는 춘풍을 담으며 추억 여행을 떠난다.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이라 다소 왜곡될 수도 있지만 "전소미"의 이름을 제외하고 99% 사실임을 밝혀둔다.

(개요)
날 짜 : 2021.3.7
들머리 : 돌산대교(돌산공원)
날머리 : 항일암 (임포마을) 주차장
거 리 : 38.8키로
시 간 : 11시간 53분

(코스)
돌산대교 - 진모교차로 - 굴전교차로 - 소미산 - 무슬목 - 대미산(357m) - 고인돌 - 월암고개 - 182.8봉 - 계동고개 - 239봉 - 본산 - 작곡재 - 수죽산(300m) - 봉화산 - 봉수산 (왕복2.4km) - 봉양고개 - 천왕산 (왕복2.8km) - 갈미봉 - 임도 - 396봉 - 봉황산 - 임도 - 산불감시초소 - 율림치 - 금오산(323m) - 항일암 - 주차장

(후기)
1979년 어느 날
나는 배낭에 몇 권의 책을 넣고
무작정 남도로 향했다.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통통배를 타고 우두리항이었는지 어딘지 기억나지 않지만,,,,
여수 여객터미널 매표소에서 가까운 섬으로 가고싶다고 했더니 내 뒤의 아주머니께서 항일암으로 가라고,,,
그러면서 집주소를 알려주셨다.
자기 집에 빈방이 있으니 공부하기 좋다고..
ㄱ자형 군용후래쉬를 들고 돌산지맥(당시에는 지맥같은 개념이 정립되지도 않았고 돌산은 지맥에 들지도 못했음)을 타고 향일암으로 가기로...

오늘 그 옛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그 길을 걸어본다.
당시에
도로를 따라 걸으며
소미산은 오를 생각도 못했고
무슬목해변 점빵에서 떡라면과 아이스케키를 사먹고
대미산은 오른 기억이 난다.
월암동굴, 대미산(달음산)의 월암산성의 흔적이 기억을 새롭게 하고

도로를 따라 걷다가 봉수산에 올라 천마산을 보고 감탄했으며, 수죽산은 나뭇꾼들이나 오르고 나는 오를 수도 없었다.
봉덕초등학교 근처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새벽에 봉황산(당시 이름은 몰랐음)에 올라 율림치 방향으로 하산하다가 순사들에게 연행되는 고초를 ㅜㅜ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 새벽에 산에 올라갔다고 신고를~
그래서 그날 금오산은 오르지도 못하고 항일암도 그날 못갔다.

4시간을 조사받고 ㅎㅎ
아주머니의 주소를 찾아갔다.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거의 1달을 그집, 마당깊은 집(김원일의 소설이 아니다)에 보냈다. 한맺인 금오산과 향일암을 거의 매일 갔었다. 원래 나는 새벽부터 오전에는 죽어라 공부하고 오후에는 노는 체질 ㅎㅎ

어느 날
그집 아저씨가 배타러 가자고 ㅎㅎ
그분은 어부이다. 그래서 그 이듬해 나온 "어부의 노래"를 나는 엄청 좋아한다.
배에서 직접잡아 뜬 싱싱한 회,
카! 진짜, 최고의 맛.

그 집의 식구는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16세된 무남독녀 외동딸.
그런데, 학교를 안다닌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내가 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 아주머니께서 부탁을 햐신다.
딸 좀 가르쳐 달라고,,,

그날의 동백꽃
아니다, 그 때는 여름이라 꽃은 없었다.
아무튼, 그날 42년전의 추억을 그리며
밤바다 바람맞으며, 돌산지맥을 걷는다.

1979년 항일암아래에서

꽃들의 찬가1
꽃들의 찬가2
꽃들의 찬가3
꽃들의 찬가4
꽃들의 찬가5
꽃들의 찬가6
꽃들의 찬가7
꽃들의 찬가8
꽃들의 찬가9
출발 2km 지점 부대앞에서 우회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
상포교차로를 만나는데
1.1km 돌산로를 따라 걷다가 우측 비고리리조트 방향으로 올라 첫 번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계속 야산을 넘어 굴전교차로에서 좌측으로 안굴전길따라 걷다보면 1.3키로 지점
메종블랑쉐 펜션에 소미산 0.6km이정표가 나온다.(사진은 메종블랑쉐 펜션)
그 어부의 딸, 16세 전소미라고 하자. (실명은 그분을 위해 숨긴다)
나는 교육심리학(교직과목), 아동심리학, 청소년 심리학, 노인 심리학(사회복지사 과목 - 1급 자격증 소유 ㅎㅎ)을 배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의 마음을 읽을줄 모른다.
내가 항일함 뒷산 금오산을 오를 때마다 소미가 뒤따라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소미산 정상)
그날부터 저녁시간에 소미를 공부시켰다. 검정고시 전과목 - 그 당시 친구에게 부탁해서 검정고시 공부할 수있는 전과목, 당시에는 통신강의록이라고 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이 천부적이었는지, 소미가 천재적인 머리 소유자 였는지, 한 달만에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했다. 15일도 안되었던 거 같다. 중학교 중퇴했는지? 8월 초에 시험봤으니까. 8월20일에 나는 그곳을 떠났다.
(뒤돌아본 무슬목 해변과 소미산)
떠나기 전날
나는 세 식구앞에서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첫 번째곡 - 이스라엘 민요
https://youtu.be/Dk83rEZcqdQ
두 번째곡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의 탈출(Exodus - 출애굽기)
https://youtu.be/C1sSfNHghZc
동네 분들도 몇 분이 오셨다. 15명인가~
내 노래에 눈물바다가 되었고
나는 동네분들이 따라준 술에 취하지도 않고 나도 주저앉아 울었다.
이번에 시간이 되면 그분들 찾아뵐까 했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떠나는 날
단정히 꾸민 전소민 그리고 소민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나에게 큰절을 하신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한달 전
여수에서 일을 보시고 그곳에서 하루 밤을 주무시는데, 꿈에 북쪽에서 큰새가 날아와 어머니앞에 내려앉더라는~
헤라크레토스는 "만물은 흘러가고 있으며, 무엇 하나도 멈추고 있는 것이 없다"
또한, 유명한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라는 말이 있듯이
42년전의 돌산도의 모습도 변하고, 산길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있다.
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나는
카놋사의 굴욕을
한신의 굴욕을
고다이바 부인의 굴욕이 생각났다
몽테뉴의 "무엇을 알것인가"에 깊은 생각으로 소미를 "고려학원"에 등록시키고 저녁에 모르는 것은 내가 가르쳐 주곤했다.
소미의 어머니는
한달에 한 번씩, 쌀, 김치를 보내주시고
나는 여전히
시간될 때마다, 북한산 족두리봉, 향로봉에 오르곤 했다.

73년 일기장 내용이다. 새벽 두시 북한산의 통행금지에도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 당시 야등을 ㅋㅋ 후래쉬도 없었는데~
소미의 신체는 성숙한 편이었다
17세 소녀가 사복을 입으면 여대생처럼 보여
집까지 따라오는 남 대학생들이 종종있었다.
오른쪽 평평한 봉우리가 봉수산이다.
그당시 등산로도 없었는데,
지금은 SUV차량이면 정상까지 갈 수있다.
지금은 봉수산 정상에 봉화를 올렸던 터가 있고 산림감시초소가 있으며, 정상에서 보이는 조망이 환상적이다.
본산성이다.
접니다1
B코스 가시는 분들은 이곳 작곡재에서 출발.

작곡재는 잣나무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잣골(柏谷)"이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잣골이 작곡(作曲), 작국(作局)으로 엉뚱하게 변하면서 마을 앞에 있는 재(峙)가 작곡재로 되었다고 한다.
봉수산을 왕복하기위해 일행(그냥가님, 어린왕자님)께 양해를 구하고 237봉부터 나홀로 간다.
산에 대나무가 많다고
크지는 않지만 엄청많다.
영화 "와호장룡"이 생각난다.
접니다2
봉수산 오름길에 뒤돌아본 봉화산
봉수산 정상이다.
 
산림초소. 등산스틱이 감시원이 상주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봉수산의 봉수대
왼쪽이 천마산이고 오른쪽이 소미산이다.
천왕산 오름길에 반가운 노루귀양
이곳이 천왕산이다.
천왕산에서 본 송도, 화태도 등등
멋진 조망이다.
전소미
코피 터지게 공부를 한다
학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한문, 일본어
그리고 영어문법 등등
(다녀온 봉수산)
저녁에 나는 소미에게 가르쳤다.
(이 아이는 상사화)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돌산도에서 나의 옷을 소미의 어머니가 빨았던 것이 아니라 소미가 빨았다고 어머니가 귀뜸하셨다. - 소미가 어머니에게 떼를 쓰다시피 빼앗아서 빨았다고.
아이고 창피해라 ㅜㅜ 내 속옷 ㅜㅜ)
(다녀온 천왕산이다)
봉양고개에서 갈미봉 들머리 오르자 마자 노루귀밭이다.
오를 수가 없다.
예쁜 아이들이 나의 오감을 마비시키고 있으니~
접니다3
봉양고개에서 갈미봉(해발331m)까지 약 0.5km 은근히 빡쎄지만 노루귀낭자들 매력때문에 힘들줄 모른다
소미의 어머니는
나를 소미의 후견인 이상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갈미봉에서 내려와서 임도에서 오늘 제일 높은 봉황산(462m)까지 약 1.4km구간 은근히 빡쎄다.)
접니다4
승월저수지
42년전 저곳에서 이곳 봉황산에 올랐다.
감회가 새롭다.
지나온 수죽산이 보인다
일행을 만났다. 통화하다가 봉황산 들머리를 놓쳐 흔들바위 근처까지 갔다가 봉황산으로 돌아와서 간식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버스에 탔던 분이 나에게 너무 잘 간다고 ㅜㅜ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부실한 체력을 안다. 항상 힘들다.
해발100m일지라도
해발1915m일지라도
항상 힘들다
그래서 잘 오르는 분들을 보면 부러울뿐이다.
로마의 프리우스는 "비장을 떼어 낸것 같이 뛴다"는 말이 생각난다.
비장은 위 부근에 달린 공 모양의 창자의 일부인데 급격한 운동을 하면 흔들려서 붓기 때문에 통증을 일으키게 되어 더 이상 뛰지를 못한다고 한다.

(사람의 비장은 주먹만 한 크기로 혈액의 성분들을 걸러주는 기관이다)
그래서 사냥개에게 비장을 뽑아내는 수술을 한다고 한다.
나도 산을 잘 오르기 위해 비장을 뽑을까?
가시고기의 조창인
그의 "등대지기"가 생각난다.
숨결, 영혼을 담지않은 등대는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는 "문학은 자기 구원의 행위"라고 했지만,
나는 "문학과 등산은 나의 구원행위"라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오래 전에 살아있는 나무에 새긴 어떤 ㅆㄱ지 없는 사람의 행위는 어떠할까, 김천나무 언제나 그자리님이 이걸 보면 너무 슬퍼 잠못 이룰듯)
어느 산이든 조금이나마 금강산의 외모를 갖고, 배달민족의 혼을 갖고 있다
엘리자베쓰 여왕이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 산과 결혼한 분들이 상당히 많다.
접니다5
그런데, 나무에 낙서를, 프라스틱병, 캔커피 깡통, 막걸리통, 심지어 담배꽁초까지도 버리는 분들은 등산학개론부터 배우고 산을 올라야 하지 않을까.
(율림치에서 금오봉까지 1.2km 완만하게 오를 수있고 등산로 좋다.)
버스에서 부터 거의 24시간을 함께 보냈던 분들
멋진 두 분
돌아본 금오산
소미는 1년을 공부해서 고등학교과정을 끝내고
금오산 정상에서 당겨본 낚시배. 도시어부팀은 아니겠지
금오산 정상에서 당겨본 타고온 버스
위태 위태한 바위
접니다6
소미는
1년을 더 공부해서
당당히 서울교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전망좋은 곳에서 항일암까지 철계단과 데크계단으로 되어있어 편하게 내려올 수있다.)
소미의 부모님은 입학식에 참석해서 눈물바다를 이루게했고
나에게 예언인 듯한 말을~
소미를 부탁한다고
입학식을 보고
한 달 후에
두 분은 풍랑에 배가 뒤집혔고, 여전히 바다에 계신다. ~ing
전소미는 서울의 모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역시 진행형. ~ing